
오쿠다 히데오
현실도피의 이유로 책을 읽었던 적이 있었다. 50분 남짓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면서, 쉴새없이 머릿 속에 떠오르는 걱정들을 물리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자극을 찾던 때였다. 그렇다고해서 이른 아침부터 알코올을 찾을 수는 없으니, 가장 손쉬운 대안이 활자였다. 지하철 노선도는 기본이고, 출입구 옆의 광고판과, 그 광고판 사이에 누군가 끼워놓은 광고지까지. 글자라고 인식할 수 있는 것들은 가리지 않고 읽어댔다. 그렇게 끊임없이 뭔가를 밀어넣지 않으면 온갖 걱정거리들이 역류하는 하수구처럼 순식간에 머리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렸으니까.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생에서 가장 독서량이 많은 시기도 그 즈음이었던 것 같다. 그런 독서를 제대로 된 독서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쯤 읽게된 작가가 오쿠다 히데오였다. 친숙한 소재와 간결한 문장, 독특한 유머 감각, 빈틈투성이어서 오히려 인간적인 캐릭터들.
남편과 UFO

남편 다쓰오가 UFO를 봤다고 한다. 그러니까 새로운 전문용어라든가 비유적 표현이 아닌, 말 그대로 '미확인 비행 물체(Unidentified Flying Objects, UFO)'를 봤다는 것이다. 마흔 두 살의 남자가 UFO라니. 다쓰오와 17년째 결혼 생활 중인 미나코는 걱정이 앞선다. 갚아야할 주택 융자금은 28년이 남았고, 생활이 전적으로 남편의 수입에 달려 있는데 뜬금없이 UFO라니. 미나코의 이런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쓰오는 칠레 나스카 지상화 - 외계인과 관련된 것으로 유명한 - 투어를 꿈꾸고 UFO 연구 보고회라는 유사종교단체(?)에 참석해서 열변을 토하기도 한다. 아담스키형 UFO를 탄 외계인에게 배운 음악을 미나코에게 허밍으로 들려주면서 말이다. 요컨데 그는 진심인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만난 남편의 회사 동료를 통해 사정을 알게된 미나코. 다쓰오가 겪고 있는 불합리한 사정을 듣고, 미나코는 다쓰오를 구하기로 결심한다. 요가 교실에 다닐 때 입던 전신 레오타드를 입고, 모헤어 니트와 미니스커트를 입었다. 변장을 마치고, 그녀는 MM성운에서 온 카피별 외계인에게서 다쓰오를 구출하러 출발한다. 과연 미나코는 외계인에게서 다쓰오를 무사히 구출할 수 있을까. (이후는 스포라서 생략)
우리집 문제
★ 달콤한 생활? - 다나카 준이치(32세, 남, 회사원) : “아직 신혼인데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
★ 허즈번드 - 이노우에 메구미(주부, 임신 6개월) : “남편이 회사에서 짐짝 취급 당하는 것 같다.”
★ 에리의 4월 - 하마다 에리(여, 고3) : “아무래도 엄마 아빠가 이혼하려는 모양이다.”
★ 남편과 UFO - 다카키 미나코(40대, 전업주부) : “남편이 UFO를 봤다고 했다.”
★ 귀성 - 기시모토 사요(29세, 여, 회사원) : “결혼하고 처음 맞는 추석이다. 시댁? 친정?”
★ 아내와 마라톤 - 오쓰카 야스오(남, 46세, 소설가) : “아내가 마라톤을 하겠다고 한다.”
각기 다른 문제를 가진 여섯 가족의 이야기를 오쿠다 히데오 특유의 유머와 따스한 분위기로 펼쳐낸다. 퇴근 후 집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새내기 유부남의 모습이나 부모님의 이혼을 염려하는 에리의 마음 흐름을 읽고 있으면, 이건 작가의 경험담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섬세하고 리얼하다. 특히나 베스트셀러 작가의 아내로 헛헛한 마음에 마라톤을 시작한 사토미의 모습은, 어쩌면 오쿠다 히데오 가족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상상에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나날이 높아지는 불쾌지수에 라이트한 읽을거리를 찾는 사람에게 제격인 책이다. 다만 쉬운 읽기에 비해 메세지는 가볍지 않다.
Underline
p. 41
학력은 보험이야. 특출한 재능이 있는 개인에게는 학력이 필요 없지. 하지만 그런 인간은10만 명에 한 명 정도나 있을까 말까거든. 그러니까 부모는 자식에게 최대한 좋은 보험을 들어 주려는거 아니겠어?
p.51
"무슨 소리야. 후회 안 해. 나, 결혼해서 행복해."
기를 쓰고 말했다. 절반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p.61
서로 다른게 당연하다, 가치관이 다른 것을 크게 신경 쓸 필요 없다. 오히려 다른 편이 자식을 키울 때는 유리하게 작용한다, 자식은 부모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동시에 보면서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 유일한 가치관보다 훨씬 좋다.
p.94
남편은 회사에서 정말 어떤 위치에 놓인 것일까. 메구미는 그게 불안해서 가슴 속에 늘 잔물결이 일었다. 차라리 회사에도 생활 통지표가 있었으면 좋겠다.
p.113
의자 뺏기 게임에서 졌다고 행복까지 빼앗겨야 하는 것은 아니다. .. 메구미는 배 속의 아기에게 말을 걸었다. 네가 어른이 되었을 때도 엄마는 딱 두가지만 바랄게. 농담이 통하는 사람일 것. 그리고 포기하지 말 것.
p.208
해답은 없다. 가족에게는 매뉴얼이 없다.
p.312
"여보, 무리는 하지 마. 기권해도 부끄러운 일 아니니까. 절반은 걸어도 돼"
야스오는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그렇게 말했다.
"안 되지, 기권은. 시합이든 뭐든 죽을 힘을 다해 끝까지 싸우면 이기는 거야."
"맞아. 끝까지 절대 포기하지 마. 자신을 이기는 거야, 근성있게!"
아들들은 기세등등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다, 어른들은 지는 것에 익숙해서 미리 연막을 피운다. 그러나 열다섯 살은 경쟁의 한가운데 있는 생물이다. 져도 된다느니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p.314
" .. 인간이란 참 골치 아픈 존재죠?"
맞는 말이다. 그러니 소설가라는 직업이 성립하는 것이다.
'소소한 후기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뷰/책] 짧은 소설 쓰는 법 / 이문영 - 치유의 글쓰기 (0) | 2021.12.08 |
---|---|
[리뷰/책] 뉴타입의 시대 / 야마구치 슈 - 당신은 뉴타입인가? (0) | 2021.09.11 |
[리뷰/책] 타이탄의 지혜들 / 데이비드 M 루벤스타인 (1) | 2021.08.11 |
[리뷰/책] 남자는 고쳐 쓰는거 아니다 / 이명길 (0) | 2021.07.29 |
[리뷰/책] 보이는 세계는 진짜일까? / 조용현 (0) | 2021.06.2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