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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후기/책

[리뷰/책] 서재 결혼시키기 / 앤 패디먼

by 랩장 2020. 11. 28.

EX LIBRIS

 지금이야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500년 전만 하더라도 책은 상류 귀족이나 성직자들만이 소유할 수 있는 성스럽고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공공 도서관이 없었을 그 시절, 지인들 사이에서 책을 빌려 읽는 것은 사교활동의 한 가지 방법이었을 것이구요. 빌려준 책을 잊어버리거나, 누구의 책인지 알 수 없는 일이 빈번했을 겁니다.

  이 고급스러운 물건의 주인을 표시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EX LIBRIS (엑스 리브리스, 장서표, 藏書票, bookplate) , 즉 소유주의 문장이나 초상화를 그린 종이를 책 앞 뒤에 붙이는 방법입니다. 필경사가 한글자 한 글자 옮겨 쓴 종이를 양피지로 감싼 책은 하나의 예술품에 가까웠죠. 마찬가지로 EX LIBRIS도 초기의 가벼운 표식에서 점차 그 소유주의 개성을 담게 되었을 겁니다. 

 

EX LIBRIS, 출처 https://www.claradelorenzi.com/ex-libris-room

 

서재 결혼시키기

서재 결혼 시키기, 앤 패디먼 Anne Fadiman

 <서재 결혼시키기>는 작가이자 편집자, 글쓰기 교사인 앤 패디먼이 4년에 걸쳐 쓴 열 여덟 편의 에세이를 모은 책입니다. 병합파인 남편과 세분파인 저자가 결혼한 지 5년 만에 책을 합치는 과정을 담은 첫 에피소드는 그야말로 진성 책 덕후들의 고민들이 빼곡히 담겨 있는데, 이런 주제로 아옹다옹 사랑다툼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더군요. 디테일을 논할 수 있는 상대라는 건 적어도 해당 주제에 대해 나 이상의 깊이를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니까요. 그런 상대방을 만나는 일조차 기쁜 일인데 심지어 반려자라니요.

 

10번 넘도록 반복해서 읽은 서문은 이 책이 처음이지 싶네요

조지는 병합파다. 나는 세분파다. 그의 책들은 민주적으로 뒤섞여, 문학이라는 포괄적인 깃발 아래 통일되어 있었다. 어떤 책은 수직으로, 어떤 책은 수평으로, 심지어 어떤 책은 다른 책 뒤에 꽂혀 있기도 했다. 내 책들은 국적과 주제에 따라 소국들로 분할되어 있었다. ... 따라서 내 책들은 늘 엄격하게 조직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결론은 작가 이름순. 결국 조지는 굴복하고야 말았는데, 진심으로 내 논리에 감복했다기 보다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였다.  .... "그 작품들은 꼭 연대순으로 꽂아야 돼!" 하고 소리치는 순간 그만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그러니까 한 작가 내에서도 연대순으로 가잔 말이야?" 그는 입을 떡 벌렸다.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작품을 쓴 연도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도 않았잖아!"
나는 밀리지 않고 몰아부쳤다. "그래도 <로미오와 줄리엣>을 <폭풍>보다 먼저 썼다는 것은 알잖아. 나는 그 사실이 내 책꽂이에도 그대로 반영되기를 바래."
조지는 나와 결혼해 살면서 이혼을 심각하게 생각한 적은 거의 없는데 그 때만은 달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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