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 LIBRIS
지금이야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500년 전만 하더라도 책은 상류 귀족이나 성직자들만이 소유할 수 있는 성스럽고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공공 도서관이 없었을 그 시절, 지인들 사이에서 책을 빌려 읽는 것은 사교활동의 한 가지 방법이었을 것이구요. 빌려준 책을 잊어버리거나, 누구의 책인지 알 수 없는 일이 빈번했을 겁니다.
이 고급스러운 물건의 주인을 표시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EX LIBRIS (엑스 리브리스, 장서표, 藏書票, bookplate) , 즉 소유주의 문장이나 초상화를 그린 종이를 책 앞 뒤에 붙이는 방법입니다. 필경사가 한글자 한 글자 옮겨 쓴 종이를 양피지로 감싼 책은 하나의 예술품에 가까웠죠. 마찬가지로 EX LIBRIS도 초기의 가벼운 표식에서 점차 그 소유주의 개성을 담게 되었을 겁니다.
서재 결혼시키기
<서재 결혼시키기>는 작가이자 편집자, 글쓰기 교사인 앤 패디먼이 4년에 걸쳐 쓴 열 여덟 편의 에세이를 모은 책입니다. 병합파인 남편과 세분파인 저자가 결혼한 지 5년 만에 책을 합치는 과정을 담은 첫 에피소드는 그야말로 진성 책 덕후들의 고민들이 빼곡히 담겨 있는데, 이런 주제로 아옹다옹 사랑다툼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더군요. 디테일을 논할 수 있는 상대라는 건 적어도 해당 주제에 대해 나 이상의 깊이를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니까요. 그런 상대방을 만나는 일조차 기쁜 일인데 심지어 반려자라니요.
조지는 병합파다. 나는 세분파다. 그의 책들은 민주적으로 뒤섞여, 문학이라는 포괄적인 깃발 아래 통일되어 있었다. 어떤 책은 수직으로, 어떤 책은 수평으로, 심지어 어떤 책은 다른 책 뒤에 꽂혀 있기도 했다. 내 책들은 국적과 주제에 따라 소국들로 분할되어 있었다. ... 따라서 내 책들은 늘 엄격하게 조직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결론은 작가 이름순. 결국 조지는 굴복하고야 말았는데, 진심으로 내 논리에 감복했다기 보다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였다. .... "그 작품들은 꼭 연대순으로 꽂아야 돼!" 하고 소리치는 순간 그만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그러니까 한 작가 내에서도 연대순으로 가잔 말이야?" 그는 입을 떡 벌렸다.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작품을 쓴 연도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도 않았잖아!"
나는 밀리지 않고 몰아부쳤다. "그래도 <로미오와 줄리엣>을 <폭풍>보다 먼저 썼다는 것은 알잖아. 나는 그 사실이 내 책꽂이에도 그대로 반영되기를 바래."
조지는 나와 결혼해 살면서 이혼을 심각하게 생각한 적은 거의 없는데 그 때만은 달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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